언제부턴가 새해에 목표를 세우지 않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올해는 무슨 해니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훈계를 이어 해마다 새해 첫 날 한 해의 목표를 정하고 수첩에 쓰고 중간중간 점검하며 열심히 살았다.
쥐띠해는 쥐처럼, 소때해는 소처럼, 개띠해는 개처럼.
그러다, 왜 매일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매일 정직하고 바쁘게 사는데, 왜 내 주변은 변화되지 않고 나만 피곤한지?
왜 나만 예민한 사람이 되는지? 난 왜 일이 끊이지 않는지? 왜 잠잘 시간이 없는지?
그 변화는 사소한 일로 시작되었다.
산부인과 정기검진을 몇 년 동안 미루다 받으러 갔는데, 난소와 자궁에 물혹이 너무 크게 있어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오랜 시간을 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으며 내 몸을 혹사시켰다.
지금부터라도 나에게 못된 짓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나를 위해 염색을 안 하기로 했다.
두 달에 세 번은 뿌리 염색을 해야 했다. 염색하면 이틀 동안은 머리가 화끈거리고 가려워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염색을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처음 한두 달은 주변사람들이 별 참견 없이 잘 넘어갔다. 세 달째 부터 ‘어디 아프냐?’ ‘집안에 안 좋은 일 있냐’ ‘직장 다니는 사람이 자기 관리가 안된다’부터 온갖 얘기들을 했다.
그러다.
강경화 외무부 장관이 TV에 나오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너무 잘 어울린다’ ‘분위기 있다’ ‘자연스럽다’
거의 1년 동안을 흰머리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던 나는 ‘그분’에게 고마워해야 하는데, 갑자기 화가 났다. 나 그대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비슷해서 멋있다니 참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24살 때부터 간호사로 매일을 행복하게 살고 있고, 출근하는 것이 즐거운 이상한 사람.
남편은 3교대 근무하는 나를 안쓰러워하며, 다른 일을 알아보라고 자주 얘기하지만, 난 다른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이나, 잘하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는데 간호사 외엔 잘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럼, 간호사만 잘 하면 되지!?
나는 간호사란 직업 외에, 동네에서 녹색평론 책모임과 우리동네연구소 회원이다. 책모임은 주제를 선정해서 한 달에 한번 만나는데, 주제 외에도 서로의 고민이나, 좋은 일도 같이 챙겨주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어서 모임은 항상 즐겁다. 우리동네연구소도 한 달에 한번 만나는데, 동네에 소소한 일들에 대해 논의하고 개선할 점을 실천하는 모임이다. 사람들은 나를 간호사로 보기도 하지만, 수다스러운 동네 아낙네로도 봐 준다. 내가 술 먹고 주정뱅이가 되어도 항상 집에까지 데려다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어서 난 모임 때마다 꼭 뒤풀이를 해야 한다며 사람들을 괴롭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이 자리를 해주고, 힘들었던 일을 얘기하면 위로도 해주고, 격려도 해 준다. 모임 횟수가 쌓일수록 나는 점점 여유롭게 나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뭐든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조금씩 배운다. 내가 부족하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이 생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부족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제 쥐나, 소, 개처럼 살지 않고 원교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잠자는 시간을 아껴서 빨래를 한다든지, 반찬을 만드는 일을 줄였다. 피곤하면 잠이 안 와도 누워있고, 빨래가 쌓이면 세탁기 속에 넣고 뚜껑을 닫아 버린다. 처음에는 게을러진 것 같아 불안했으나, 티도 안 난다. 남편은 내가 뭘 안 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내 주위 사람들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힘들다고 전화하면 못 먹는 술 같이 먹어 주겠다고 오는 사람.
늦은 시간에 카톡해도 받아주는 사람.
조용히 밥 사 주는 사람.
비틀대지만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해 주는 사람들이다.
무사히 오십을 넘겼다.
지금까지 큰 탈없이 잘 살고 있는 나에게 매일매일 감사해하며 “사랑해. 원교야.”라고
잠자리마다 속삭이며 잠이 든다.
20년 동안 술 먹고 길에서 자는 나를 집에 까지 엎고 와 준 남편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형. 고마워.”
우리동네연구소 최원교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