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제가 현재 하고 있는 노동은 건설 현장의 소음이나 먼지가 외부로 확산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펜스를 설치하는 일입니다. 주요 작업이 쇠파이프를 다뤄야 하는 일인데 요즘 같은 기온에는 오전 10시만 돼도 뜨겁게 달궈진 쇠파이프가 어깨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뜨거운 쇠파이프는 마치 난로를 하나 품고 일하는 것과 같이 만들곤 합니다.
작년 여름을 노동현장에서 보낸 경험에 비춰 볼 때 폭염은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요소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건물 외부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사정없이 내려 쬐는 뜨거운 열기를 해결할 방법이 얼음물 외에는 딱히 없습니다. 물론 산업장 열사병 예방 가이드는 시원한 물을 제공하는 것 외에 그늘막 설치, 실외온도 33도 때는 1시간에 10분 휴식, 실외온도 35도 때는 1시간에 15분 휴식을 제공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온도가 30도만 되어도 노동강도가 매우 높아지고 33도, 35도가 되었을 때도 가이드가 제대로 지켜지는 현장은 대기업이 원청으로 있는 곳에 불과 한 것 같습니다. 작년 여름을 생각해 보면 폭염 경보 때 어느 현장에서도 작업을 중단 시킨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폭염에 그대로 노출 된 노동 현장을 경험하다보니 며칠 전 폭염으로 인해 발생한 현대제철 외주노동자 사망이 전과 다르게 저에게 남 일 같지 않게 다가옵니다.
얼마 전 더위에 파이프를 나르고 있을 때 어떤 분이 더위에 어떻게 일하냐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물어 오셨습니다. 저는 ‘그냥 해야죠’라고 밖에 달리 답할 게 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폭염으로 내몰리면서도 ‘그냥’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고용불안’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폭염에 노동자를 진짜 위험으로 내모는 것은 어떤 상황에도 말을 할 수 없는 환경에 있습니다.
저와 같은 일용직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불러 주지 않으면 그날 하루는 ‘실업자’로 보내게 됩니다. 과거 인력사무소를 나갔던 때를 돌이켜보면 그날 일을 얻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대략 10명 안팎으로 있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 2명이 움직이는 펜스 설치 팀에서 인력이 더 필요한 경우 현장을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는 날이 규칙적이지 않고 한 달에 8일에서 15일 사이로 ‘취업자’ 신분을 얻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제가 하고 있는 목회활동으로 인해 일을 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 같은 경우는 고정적으로 불러 주는 현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적인 안정을 갖게 합니다.
하루하루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은 노동현장의 사정에 대한 어떤 불평이나 불만 제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저도 일을 하면서 여러 번 경험한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이의 제기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입이 닫히고 말이 막히는 것은 무엇보다 다음 날의 고용 때문입니다. 어쩌면 노동자 개개인의 안전 불감증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이천 물류창고 화재사고 희생자들도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현장에 들어 갈 수밖에 없었던 원인 중 하나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어찌 보면 노동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언어’는 없습니다. 그들은 ‘말’을 할 수 없는 “서발턴”*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현장을 다니다 보면 나름 직책이 있는 작업자들이 일용 노동자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고용과 피고용의 노동제공과 임금지급의 계약 관계를 벗어나 부당한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적 관계로 비춰지곤 해 마음이 씁쓸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고용자에게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고용에 대한 고민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느끼는 바로는 오로지 자기의 수익에 도움을 주느냐 못주느냐에 고용자들의 고민은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자기의 수익에 도움을 못주는 노동자는 더 이상 고용을 하지 않습니다. 가치가 없는 노동이 어디 있을까 생각하지만 고용자가 기대하는 수익과 노동자의 생각의 편차는 매우 커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자는 노동자의 노동 자체를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 수익에 빗대 노동력을 계산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용직 노동자는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는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많은 ‘서발턴’ 가운데 한 무리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사회적 안정을 위한 전국민 고용보험 가입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찾아보니 지난 2004년부터 일용노동자의 고용보험 가입이 의무화 되어있었습니다. 건설현장의 경우 원수급자가 일용노동자의 고용보험에 대한 사업주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이것이 그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제 경우에는 한 번도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미 16년 전 일용노동자의 고용보험 가입이 법제화 되었지만 그들은 그 현장에서 배제당하고, 소외당했고 그 과정에서 일용노동자들은 ‘말’을 잃어버리고 지내 온 듯합니다.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대신 ‘말’해 줄 이웃이 필요하고,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말’을 찾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연대와 연합은 더욱 중요해 보입니다.
폭염이 더해가면서 ‘말’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말’을 찾아 올 연대와 연합의 길에 대한 고민을 더 깊이 하게 됩니다.
우리동네연구소 박민선
*서발턴
탈식민주의 이론의 개념어로 하층민, 하위주체, 종속계급 등으로 번역된다. 피지배자나 민중처럼 피억압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담론의 측면을 보다 강조하며 계급뿐만 아니라 젠더나 인종 등 다양한 억압의 축을 보다 진지하게 고려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프롤레타리아를 대신해 썼던 용어로, 1980년대 초 인도의 역사학자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를 비롯한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기존 식민주의적/민족주의적인 인도 역사 해석을 비판하고, 그동안 역사에서 배제되었던 인도 인민의 입장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들을 '서발턴'으로 지칭하며 연구를 시작하였다. 서발턴은 지배계층의 헤게모니에 종속되어있는 하층계급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노동자, 농민, 여성, 피식민지인 등 주변부적 부류가 포함된다.
구하의 역사연구 그룹에 속했으며, 이후 그룹을 벗어나 독자적인 연구로 전세계적 주목을 받은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연구자가 가야트리 스피박이다. 스피박의 대표 에세이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는 서발턴의 개념을 보다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특히 이 글에서 스피박은 인종, 계급, 젠더의 삼중억압을 받고 있는 제 3세계 여성을 '(의견을 내고 있거나 말하려 노력하지만 그녀의 말은 전달되지 않기에) 말할 수 없는 서발턴'으로 설명한다. 사회 주류적인 언어에는 서발턴의 경험과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코드가 존재하지 않기에, 서발턴의 말은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말로서 수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남성·가해자 중심적인 사회에서 피해자 여성이 분노나 무력감을 토로할 경우 이는 상황의 부당성이나 절망스러움을 고발하는 표현이 아니라 병적인 증상 때문에 나오는 비합리적인 감정 분출로 여겨지기 쉽다. (페미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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