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살아있어서 또 다른 한 해를 맞았다.
나는 어린 시절 학대로 죽지 않았고
나는 어린 시절 학원 버스에 갇혀 열사병과 산소 부족으로 죽지 않았고
나는 어린 시절 굴러오는 차에 치여 죽지 않았고
나는 어린 시절 폭력의 피해자로 죽지 않았고
나는 일하다가 과로로 죽지 않았고
나는 일하다가 끼여 죽지 않았고
나는 일하다가 떨어져 죽지 않았고
나는 일하다가 병에 걸려 죽지 않았고
나는 불법이었던 낙태 시술을 받다가 죽지 않았고
나는 젠더폭력으로 죽지 않았고
나는 코로나로 죽지 않았고
나는 코로나 시기 열병에 걸려 치료 받을 기회도 없이 죽지 않았고
나는 코로나로 모든 생계권이 박탈된 절망 속에 죽지 않았고
나는 더운 여름 더위에 죽지 않았고, 장마에 휩쓸려 죽지 않았고, 추위에 얼어 죽지 않았다.
나는 셀 수 없는 수많은 사인들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사회가 지켜주지 않는 삶의 환경 속에서
나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고
산 자로 새 해를 맞이했다.
세월호에서 마지막으로 생존한 자는 ‘산 자의 이유’를 다 하기 위해 지난 해 10월 10일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대통령이 책임을 다하라’고 요구하며 지난 11월 26일까지 노숙 단식을 했다. 48일 간의 단식으로 병원에 실려갔던 김성묵 님은 12월 4일 다시 단식을 시작했다.
노동현장에서 먼저 아들을 보내고 아들보다 더 길게 살게 된 아빠 이용관 님과 엄마 김미숙 님은 ‘산 자의 이유’를 다 하기 위해 국회 앞에서 1월 1일자 기준 22일 동안 ‘국회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하며 노숙 단식을 하고 있다.
타당성 없는 제주제2공항을 강행하려는 계획에 대항해 삶터를 지키려는 제주도민 김경배 님은 지난 10월 21일 다섯 번째 노숙단식을 시작하고 12월 2일 중단한 뒤에도 계속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먼저 보낸 동지를 위해 ‘산 자로서’ 끝까지 복직 투쟁을 하고 홀로 끝나지 않는 복직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김진숙 님은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도보 투쟁을, 그의 동지들은 청와대 앞에서 1월 1일자 기준 11일 동안 노숙 단식을 하고 있다.
2021년 1월 1일.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새해를 맞이하는 것의 이유를 생각한다.
아주 깊은 어둠과 끝나지 않는 터널 같은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에 빠지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희망을 가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유쾌한 리듬을 간직하고 2021년, 산 자의 이유를 짚으며 다시 한 해 살아내야겠지.. 그런 생각을 한다.
2021.01.01
우리동네연구소 지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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