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서 ‘코로나돈’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엉뚱하게도 이구아노돈이 생각났습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도마뱀의 한 종류인가 싶었지만, 금방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어요. 지난번 얼마씩 받았던 정부 긴급재난지원금이요. 왜 그렇게 바꿔 부르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시더군요. “쉽잖아. 이렇게 말하니까 다 알아듣던데?” 엄마는 저와 이야기 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전화하면서도 코로나돈이라는 단어를 계속 쓰셨어요. 그 때마다 저는 왠지 모르게 낯부끄럽고, 모종의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멀쩡한 ‘재난지원금’을 놔두고 ‘코로나돈’을 쓰는 지 이해가 안 됐거든요.
생각이 바뀐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엄마와 함께 삼미시장에 갔을 때였어요. 옷가게에서 엄마가 코로나돈으로 계산되느냐고 물어봤더니, 사장님이 그게 뭐냐며 껄껄 웃었어요. 엄마가 비웃음을 산 것 같아, 기분이 퍽 나빴습니다. 더불어 사장님에 대한 반감도 생기더군요. ‘코로나돈이 뭐 어때서!’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딱딱한 말보다 코로나돈이 쉽고 간편하잖아요. 그때부터 코로나돈에 대한 거부감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꼭 공식적인 단어만 사용할 때 말이 통하는 건 아니니까요.
흔히 말은 권력이라고들 하지요. 말을 선점하는 자가 권력을 갖는다고요. 단어 속에 숨겨진 위계와 체계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머릿 속에 스며들어서요. 예를 들어 ‘Man-Woman’같은 관계있잖아요. 고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만들어져서 아직까지 사용되는 말이지요. ‘긴급재난지원금’과 ‘코로나돈’의 관계는 뭘까요? 앞의 단어에 딱히 차별적인 의도가 들어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길이’와 ‘뉘앙스’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코로나돈이 발음하기도 쉽고, 정부재난지원금이니 긴급재난지원금이니 하는 여러 말이 둥둥 떠다니다 보니 엄마는 쉽고 간편한 말을 쓴 것이지요.
말은 말에만 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네, 정치에서도요. 엘리트 위주의 정치체제를 벗어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참여할 수 있으려면 접근이 쉬워야 합니다. 꼭 한자어라고 해서 어려운 것도, 한글이라 쉬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쉽게 정치에 참여하려면 언어의 장벽이라도 먼저 허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도를 넘어 일상의 민주주의를 이루려면 내 삶과 맞닿는 언어부터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제 무식함을 고백하자면 조례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그 의미는 며칠 전에 처음 알게 됐습니다. 일상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 더 살갑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해보입니다. 아파트 반상회만 해도, 반상회가 뭔지 그것만 봐서는 직관적으로 알기 쉽지 않잖아요.
일상의 변화는 말을 바꾸는 데서 온다는 식상한 말을 이렇게 늘어놓았습니다. 요즘 2차 재난지원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요. 어쩐지 저는 2차 재난지원금보다 두 번째 코로나돈이 더 반가울 것 같네요.
우리동네연구소 안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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